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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분단의 원흉은 북한과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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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조선인민군의 대대적인 남한 침략이 시작되었다.
전면전을 예상하지 못하였던 국군은 3일만에 서울을 내주고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인민군은 정면 공격을 통해 승리하였지만 유엔군으로 인해 완전한 침략에 실패하였다.
한편,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던 국군은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연합국)의 개입으로 전세를 역전하였다.
7월 13일, 이승만은 미국 CBS와의 인터뷰에서 "북한군의 행동은 38선을 제거시켜 주었고,
38선에 의한 분단이 지속되는 한 한반도에서 평화와 질서는 결코 유지될 수 없다.",[
18] "침략자를 격퇴하는 데 있어 한국군은 결코 38선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19] 인천상륙작전이후 9월 27일에 서울을 수복하였다.
이후 미군과 국군과 북진을 결행하였고 10월 1일에 대한민국이 제일 먼저 북진을 하였고, 10월 7일에 드디어 미군이 북진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이 이미 10월 9일에 주요적인 정부, 단체, 기관, 부대, 수뇌부 등을 평양에서 철수시킨 뒤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강계를 임시 수도로 정하고 주요적인 정부, 기관, 등을 그 쪽으로 철수시켰다.
10월 12일에 김일성 역시 평양에서 철수하여 덕천으로 잠시 머물렀다가, 10월 19일에 대한민국이 평양을 점령한 날에 덕천에서 철수하였고,
희천을 거쳐 강계까지 간 다음에 중국의 펑더화이를 만났다.
한편, 대한민국과 미군은 압록강까지 올라갔으나,
10월 25일에 중국인민해방군이 135만의 대군과 함께 개입하자,
국군과 미군은 다시 후퇴하였으며 12월 4일에 평양에서 철수하였고,
1달 뒤인 1월 4일엔 서울을 다시 내주었지만 3월 15일에 서울을 되찾았다.
또한, 1951년 이후 휴전 때 까지 지금의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1953년 7월 27일 교전 양측은 휴전에 합의하여 분단이 고착되었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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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통치 오보사건, 1945.12.27.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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