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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 드물지, 집 값은 바닥'…미분양 APT 입주민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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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아파트에 갇혀 몸살을 앓고 있다. 최악의 미분양 사태를 겪고 있는 대구는 더욱 심각하다.
동구·달서구·달성군 등 미분양 아파트 5곳을 둘러보니 입주민들은 새 집에서 산다는 기쁨은커녕 오중고(五重苦)에 빠져 있었다.
인적이 드문 공포감, 분양가 아래로 떨어진 집값, 턱없이 부족한 주변 부대시설, 주민 대의기구 부재, 버스노선 부재 등 한결같이
손꼽는 다섯 가지의 고통 외에도 말 못할 불편함은 곳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대구에 112㎡(34평)짜리 번듯한 새 아파트를 사 놓고도 남편의 회사가 있는 구미의 59㎡(18평) 사택이 더 정겹고 좋다는
한 신혼부부의 얘기에 귀기울여볼 만하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러 가는 길조차 무섭고 아직도 공사 자재들이 곳곳에 널려 있어 위험하기 그지 없다. 절반 정도 입주한
새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는 아직도 이삿짐 때문인지 누런 박스로 사방이 도배돼 있다. 고민이다.
언제까지 입주민들이 꽉 들어차길 기다려야 하나?"
여건만 허락하면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 빈 아파트. 가끔 만나는 사람이 무서운 곳.
현대 주거문명의 총아인 아파트가 왜 이렇게 천덕꾸러기가 되고 있는지 직접 다녀봤다.
영화 '아파트'가 개봉될 당시 경기도의 한 아파트단지 주민 423명은 영화 제작사인 토일렛 픽처스와 영화세상, 영화감독
안병기 씨를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영화상영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이유는 거주자의 평온한 권리와 사유재산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것. 이 정도로 민감한 게 아파트 시세다. 대구의 몇몇 아파트 단지들은 입주민의 자살 사건을 숨기려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무서워하는 입주민들이 이사를 나가고, 아파트 가격이 떨어질까 두렵기 때문이다.
기자가 만난 한 입주민 역시 이 아파트 시세로 인한 공포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운동을 하러 나왔다는 이 주부는 "잘 살고 있던 집을 팔아서 3억원 가까운 돈을 주고 지난해 이곳에 입주를 했는데 빈 아파트도
무섭지만 분양가보다 수천만원 아래로 떨어진 아파트 시세가 더 떨어지지 않을지가 더 무섭다"고 했다.
그는 "분양받을 때 기대했던 쾌적한 삶은 바라지도 않는다. 분양가 정도의 시세를 유지하면서 주민이 다 들어차 사람 사는 곳처럼
정겹게 사는 게 가장 큰 바람이다. 새 아파트인데도 불편한 게 너무 많아 가슴 한쪽이 뻥 뚫린 것 같다"고 토로했다.
이 아파트는 단지 내 상가와 정문 앞 도로 등이 정비되지 않아 인근 아파트 상가와 후문을 더 자주 이용하는 실정이었다.
대구 동구 한 아파트에 신혼 살림을 차렸다는 한 젊은 주부도 아파트 가격 하락은 물론 50%도 안 되는 분양률에 하루하루 무서움에
떨며 지내다 결국 아파트를 전세 놓고 친정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신랑과 함께 결혼을 준비하며 어렵게 저축해 산 집인데 들어가
살지도 못한다고 생각하니 잠을 이룰 수가 없다"고 말했다.
20일 오후 10시. 미분양된 대구의 한 주상복합 아파트를 카메라로 들여다보니 앵글에 들어오는 불빛이 무서웠다.
바둑판 같은 직사각형의 프레임에 들어오는 50여 가구 중 서너 곳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카메라를 돌려봐도 불이 켜진 집은 많아야 대여섯 곳. 지난해 분양을 시작해 올해 상반기까지 절반 이상 분양됐다는 얘기를 듣고
갔지만 입주율은 20~30%에 그치고 있었다.
회사원 이수강(가명·40·대구 달성군) 씨는 '텅 빈 아파트는 도저히 사람 살 곳이 못되는구나'라고 절절하게 느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50가구가 넘는 자신의 아파트 동에 서너 가구만 살고 있기 때문에 사람을 마주치는 게 오히려 더 무섭기 때문이다.
그는 "퇴근하고 집으로 들어갈 때 텅 빈 아파트 속에 홀로 불이 켜져 있는 우리 집을 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불안하고 적막한지 모른다"고
했다. 입주율이 올라가기 힘든 상황이라 이사를 가고 싶지만 매매가 뚝 끊긴 데다 은행에 돈이 묶여 있어 이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도시철도 역세권 불패 신화마저 꺾이고 있다. 대구 도시철도 2호선 사월 방향은 상대적으로 양호한 데 반해 문양 방향은 역세권 프리미엄
조차 사라지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다. 유명 브랜드의 아파트조차 미분양 때문에 결국 헐값에 전세를 내주는 전략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부작용도 적지 않다. 직업적·경제적·사회적 면에서 볼 때 입주민들이 워낙 각양각색이어서 주민 화합부터 힘들다.
아파트 주차장에 차량들만 봐도 그야말로 천차만별이었다. 방학인데도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 역시 텅 비어 있었다.
"주민들이 힘을 모아 아파트에 길도 내야 하고, 부녀회에서 보내주는 효도관광도 가고 싶은데 방법이 없어요."
미분양 아파트이다 보니 입주자 대표 모임이나 부녀회조차 없어 감수해야 하는 불편함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 아파트단지의 경우
입주자 대표 모임을 통해 아파트 정문 오른쪽으로 길을 내 달라고 구청에 건의를 해야 하는데, 분양률이 50%이하라 임시 입주자
대표밖에 없다. 임시 대표는 정식으로 길을 내 달라는 건의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버스 노선이 아예 없거나 버스 한 대만 다니는 아파트 단지들도 많았다. 도시철도나 버스 정류장까지 적게는 5~10분, 많게는
10~15분을 걸어가야 하는 아파트 단지들 중에는 인도 곳곳에 공사 자재들이 널려 있거나 공사를 중단한 상태의 공터가 많아 위험하고
무서운 곳이 적지 않았다. 버스 노선 신설, 인도와 진입로 정비 등 주민들이 힘을 모아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는데 누군가 나서서
목소리를 높일 분위기조차 되지 않는 곳도 여럿이었다.
달성군의 한 아파트 단지 벤치에서 만난 70대 노인의 얘기는 더욱 안타깝게 들렸다. "예전 아파트에 살 때는 경로당에 사람도 많았고,
부녀회에서 1년에 두번씩 관광도 보내줬어요. 새 아파트라고 들어왔는데 부녀회가 없으니 효도관광은커녕 이야기를 걸 만한 노인들도
만나기 힘듭니다. 산책을 다니기도 위험한 곳이 많아 혼자 벤치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요."
학원, 병원, 은행 등이 없어 다른 아파트 단지까지 걸어가야 하는 곳도 많았다. 단지 내 상가가 있으나 활성화되지 못해 문을 닫거나
빈 상태로 있는 곳이 많았으며 부동산중개업소조차 한산한 곳이 대부분이었다. 더욱 더 걱정스러운 건 이처럼 황폐한 상황이 언제
끝날 지 누구도 약속해줄 수 없다는 답답한 미래였다.